(단편소설) 샐러리맨 외전 – 황태자의 눈물 4

2017년 9월 23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대법원장이 퇴임했다. 퇴임사에서 오현 스님의 ‘고목 소리 들을려면’을 인용했다.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 소리 들으려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 있어야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설명했다.
“오래 되었다고 다 고목이 아닌 모양입니다. 고목에는 이파리도 몇 개 없고 줄기도 볼품없지마는 모진 풍상을 견뎌온 흔적에서 숙연한 연륜의 향기가 풍겨옵니다. 저는 제가 그저 오래된 법관에 그치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이 상처에 싸여있는 고목과 같은 법관이 될 수 있다면 더 없는 영광과 행복으로 여기겠습니다.”
판사가 법률에 따라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국민과 함께 부둥켜 안아야 한다. 고목처럼 속이 썪고 팔다리가 뭉개지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구제한 다음에 부처가 되겠다는 지장보살의 마음도 없으면서 감히 ‘고목과 같은 법관’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판사 블랙리스트 파문 및 재판거래 의혹까지 받고 있는 대법원장의 퇴임사로는 결코 어울리는 않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회장님, 대법원장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강변하는 걸까요?”
비서가 짐짓 그를 떠보는 듯했다.
“대법원장이 진실을 밝히지 않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권과 결탁하여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벌였을지 끔찍할 정도라네.”
그는 상당히 흥분하고 있었다. 대법원장이 저 지경이라면 대법관들을 포함한 꽤 많은 법관들이 대법원장에게 동조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법권에 대한 실망감으로 못마땅하던 얼굴이 점차 벌겋게 달아올랐다.   
9월 28일 오후, 서정바이오 회장 집무실. 
커피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온 비서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슬쩍 말했다.
“한달 만에 특검과 황태자 측이 항소심 법정에서 다시 만나서 법정에 소환할 증인과 신문 순서 등 재판 계획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답니다.”
비서의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벌써 2심이라니…”
비서가 싱글싱글 웃으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번 2심은 어차피 집행유예 받을 거라던데요.”
그가 눈을 번쩍이며 날카롭게 물었다.
“혹시 자네는 이 재판의 결과가 궁금한 것인가? 아니면 황태자의 행보가 궁금한 것인가?”
“……”
비서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씨익 웃었다. 마치 꼬투리 하나 잡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황태자가 61억 원을 종잣돈으로 이건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우리 서정바이오를 필연적으로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가?”
비서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에게는 내일 임시주주총회가 더 중요하네. 비록 내가 나서서 뭘 할 게 없더라도.” 
서정바이오를 향해 칼을 겨누고 찌른 다음에 그것을 비틀어 돌리려던 악랄한 세력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까지도 그가 그들에게 보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자사주 취득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황태자가 유죄든 무죄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건바이오를 보면서 ‘닭 쫓던 개’ 속담을 잠시 떠올렸을 뿐, 단 한 번도 경쟁자로 여긴 적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9시, 임시주주총회 개최 장소인 인천 송도컨벤시아는 기대감에 부푼 주주들로 벌써 북적거리고 있었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대주주가 아닌 소액주주들의 요청으로 임시주총이 열리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 분명했다. 주총이 시작되기 전부터 주총장 내부는 이미 주주들로 가득 찼다.
10시가 되자 서정바이오 공동대표이사가 연단에 올라왔다.  
“오늘 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는 의결권을 위임한 주주 및 한국예탁결제원을 통해 실질주주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를 포함 1만3324명이고 그 소유 주식 수는 6272만5702주입니다. 이는 당사가 발행한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총수의 51.4%에 해당합니다.”
코스피이전상장에 필요한 보통결의는 발행주식 총수의 25% 이상 출석과 출석주주 의결권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의결 요건을 갖췄다는 발표에, 장내는 순식간에 환호의 물결로 휩싸였다. 
이 다음부터는 순서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공동대표이사가 승인을 선포한 뒤 의사봉을 세 번 내리치자 주주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상장주관사를 조금 서둘러 선정한 후에 2개월이 지나면 예비심사청구서를 제출할 수 있다.
주총이 끝날 무렵, 그가 느닷없이 주총장을 방문했다. 그는 단상에 올라 앞으로의 계획을 전하고 참여한 주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발언이 끝난 후 공동대표이사가 폐회를 선언했고, 주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삼삼오오 주총장을 빠져나갔다. 

10월 10일, 이전 정부 청와대 내부문건에서 이건그룹 회장을 ‘왕’, 부회장을 ‘세자’로 칭하며 이건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사실이 공개되었다. 
“이것은 아니야, 정말 말도 안돼!”
그는 집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던 중이었다. ‘지금 이 마음은 분노일까? 놀라움일까?’를 생각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그런 의아함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황태자와 관련된 청와대 문건이 알려지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욕설이 툭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하아! 말도 안돼.”
그의 입에서 한숨과 섞여 흘러나오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누가 자신의 정신을 쏙 빼먹은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진짜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정을 책임지는 청와대에서 일개 회사의 경영권 승계를 지원한다는 문건을 작성해서 그대로 시행할 수 있단 말인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그는 2015년 12월 이건바이오 제3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당시 대통령이 보건복지부 장관을 대동하고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발파 단추를 눌렀던 것을 기억해 냈다. 뿐만 아니라 기공식을 앞두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건바이오 사장이 ‘이건바이오가 좋은 제품을 좋은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면 바이오제약사들이 위탁생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 것도 떠올렸다. 그때 그는 언론보도를 통해서 그 내용을 알았고,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건바이오가 설립되기 훨씬 전부터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신약 개발에 나서는 제약·바이오 기업이 늘면서 고객에게 수주를 받아 의약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의약품 위탁생산(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CMO) 시장이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대한민국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시 봐도 황당할 뿐이네.”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포근했던 집무실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 머릿속의 모든 회로가 고장난 듯 잡다한 생각마저 모조리 꽁꽁 굳어 버렸다. 신문을 쥐고 있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을 때, 청와대 핵심인사들이 제정신이었다면 문제가 될 만한 내부문건들을 전부 없애는 게 당연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자료를 차기 정부에 넘긴 것 같단 말이지.”
청와대 문건들을 일부러 없애지 않고 캐비닛에 고이 놔둔 것이라면, 내부고발자가 될 수 없어서 차선책으로 자폭을 선택한 셈이었다. 이 문건들은 특검 측에게 천군만마를 제공한 것과 같았다. 그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남아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집무실 책상을 등진 채 살짝 열려 있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깥 풍경을 봐도 여전히 기가 막힌 듯 답답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쥐어 있는 신문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글자들을 몇 번이나 훑고 또 훑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돌아다녔다.  
“……”
말문이 막혔다. 생각할수록 거지같은 인연이 분명했다. 누구는 청와대 전체가 돕겠다고 발벗고 나서고, 누구는 온갖 불법 공매도가 자행되어도 모르는 척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단번에 다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데자뷰 같은 찜찜한 기분. 왜 그러는 것인지 지금껏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해외 매각 발언 직후에 주가가 반토막 났던 일의 실마리가 오늘에서야 풀렸던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져도 정권 차원에서 눈을 감았던 게 분명했다. 
“후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그룹 회장이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두 달 뒤인 2014년 7월께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작성한 이건그룹 경영권 승계 문건에서 ‘왕이 살아있는 동안 세자 자리를 잡아줘야 한다’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이건그룹의 컨설팅 회사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이것은 국정농단 차원이 아니라 숫제 이건그룹의 손바닥 위에서 청와대가 농락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빌어먹을. 그래서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인가?” 
정말 빌어먹을 악연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주들을 달래 왔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게 다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별일 아니라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5천억 원에 팔라는 제안을 거절했을 때부터 잉태된 악연의 끝을 보고 싶었다.
“이제는 그때처럼 맥없이 당하지 않겠어.”
그가 신문을 와락 구겼다. 2015년 7월에 작성된 청와대 비서실장 주재 회의 문건에 이건물산과 갑질모직 합병을 위해 외국인 투자자들의 우려를 씻을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고 경제수석에게 지시한 내용이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만약 이건그룹에 불리한 문건들만 없앴다면, 그래서 이건그룹이 청와대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서 뇌물을 상납한 것으로 둔갑시키는 게 과연 불가능할까? 정치 경제 언론마저 장악한 이건그룹이 이 나라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그가 무참하게 구겨진 신문을 휙 집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이거야말로 당시 청와대와 이건그룹이 황태자의 경영권 승계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겠지. 차라리 자백하고 선처를 바라는 게 낫겠지만 그럴 리도 없고. 사법부에도 이건그룹의 장학생이 많다고 하던데 과연 항소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벌써 기대되는군. 클클!”
그는 12일부터 시작되는 황태자의 항소심 재판에 청와대 문건들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하면서 집무실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