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14장 (3)

“으…”

이철희의 마혈을 풀자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괜찮은가, 부회장?”

“여, 여긴 어디요?”

이철희가 적의(敵意)를 품은 채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창문 하나 발견할 수 없는 꽉 막힌 공간임을 깨닫고 이내 실망의 눈빛을 보였다. 철문이 유일한 출입구였던 것이다. 

“그것까지는 알 필요가 없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시오.”

이철희는 귓가에 울리는 상대방의 싸늘한 목소리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 알겠소.”

청수는 이철희의 눈꼬리에 매달린 후회의 찌꺼기를 보았다. 그래서 굳이 빙빙 돌려서 질문할 까닭이 없다고 판단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왜 죽이려 했는가?”

“그, 그건…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소.”

“대답하게. 대답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청수가 아무리 달래고 구슬려도 이철희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어떤 내용도 말하지 않겠다는 이철희의 결의를 파악한 청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수혈(睡穴)을 짚어 잠들게 했다.  

이철희가 침대 위에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청수는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후계자로서 왜 그런 무모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청수가 고민하고 있을 때, 철문이 열리더니 평정대원 한 명이 들어왔다. 

“12 명에 대한 심문을 모두 마쳤습니다만, 아무도 부회장의 의도를 알지 못한답니다.”

“그렇겠지. 그들은 부회장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을 수하들이 아닌가.”

“그럼 어찌할까요?”

“당분간 이대로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사형.”

“자네도 그만 쉬게.”

이철희를 남겨두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그그긍!’ 소리와 함께 철문이 굳게 닫혔다. 

청수가 밖으로 나오자 또 다른 평정대원이 급하게 뛰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급하게 오는가?”

“사형!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별종 회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사제 일행을 먼저 만나고 온 듯하군.”

청수가 이별종 회장이 머물고 있다는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그곳에는 화교 노인과 이별종 회장이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청수가 이별종 회장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이별종이 청수를 한번 쓱 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말로만 듣던 평정대 수장인가? 과연 화교협회에 새바람을 일으킬 재목이 맞구만. 허허!”

“과찬이십니다.”

청수가 짧게 대답했다. 그의 태도에 화교 노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청수에게 말했다.

“이분을 그에게 안내해 드리게. 우리가 더 이상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을 터.”

“알겠습니다.”

청수가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이별종과 그의 수행원들이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이철희가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선 이별종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철희야!”

청수가 이별종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수혈을 짚어 잠들었으니 깨우면 일어날 겁니다.”

이별종이 가볍게 혈도를 눌러 이철희를 깨웠다. 

“으음!”

이철희가 눈을 뜨자 이별종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 아버지!”

“못난 놈.”

“죄송합니다.”

이철희가 고개를 푹 숙이자 이별종이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이만 여길 떠나자.”

이별종이 일어서며 청수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이 고마움은 기회가 되면 꼭 갚도록 하겠네.”

“아닙니다. 할일을 했을 뿐이니 마음에 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닐세. 은혜를 갚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나?” 

이별종이 한숨과 함께 이철희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왕에 일이 벌어졌으니 이번 일의 잘잘못은 엄히 따지도록 할 것이네. 못난 자식을 위해 대충 덮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비밀로 해달라는 것뿐이네.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니까.”

청수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청수는 이별종의 약속을 믿었다. 밤의 대통령 스스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구두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 마음에 이렇게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꼈던 것이다.  

이별종은 이철희와 특무대원들을 데리고 화교협회 건물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담담한 표정의 이별종과 달리 이철희는 전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이별종의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서정은 이철희 사건을 찬찬히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부터 분석했다. 조각가가 대리석을 다듬어 명작을 만들어내듯 꼼꼼하게 파헤쳤다.

이철희의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은 분명하지만, 단순히 개인 감정으로 그런 엄청난 짓을 벌였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서정이 집중적으로 고민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철희가 스스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서정이 앙골모아 대왕의 부활을 돕는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했으며, 그래서 서정을 추적했더니 가면 쓴 여자가 나타난 곳에는 반드시 서정이 있다는 정황 증거도 확보했다고 단언했다. 

앙골모아 대왕의 후계자가 특정 바이오 기술을 필요로 했고, 가면 쓴 여자가 그 기술을 강탈한 상황에서는 그녀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중심은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후계자와 만난 그녀는 무엇을 요구했을까? 아니면 후계자가 오히려 그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마음껏 농락하고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서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가면 쓴 여자가 등장한 최초의 사건이 LBA바이오였는데, 그때만 해도 앙골모아 대왕의 후계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어. 우발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필연적인 사건이므로, LBA바이오에서 중요한 단서를 빠뜨린 게 있지 않을까?”

빠뜨린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LBA바이오를 반드시 재방문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서정이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일행에게 즉시 알렸다. 다 함께 논의한 끝에 LBA바이오를 방문하기로 결정했고, 지금 서정 일행은 LBA바이오를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운전은 태리녀가 도맡기로 했다. 그래서 서정은 지난 번처럼 뒷좌석에 앉게 되었다. 여유가 생기자 서정은 스마트폰으로 서정바이오와 관련된 자료를 검색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서정바이오가 자사주 매입을 결정함으로써 폭락했던 주가가 바닥 탈출의 조짐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중 무역전쟁이 점차 해소되려는 듯한 기류가 양국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도 좋은 징조라고 서정은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산도즈가 리툭산 바이오시밀러 릭사톤의 미국 승인을 포기했다는 외신의 보도 내용도 대형 호재라고 판단했다. 
 
“이제 실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남은 셈인가?”

서정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문득 서정을 바라보던 왕위안이 한마디했다.

“선배님,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 시각, 앙골모아 대왕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노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TV를 탐닉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가면을 벗은 여은혜가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때, 여은혜를 따르는 또 다른 노인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여은혜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이 애원하듯 타오르고 있었다. ‘빨리 물어 보세요’라는 눈짓을 그녀에게 보냈다. 

“무슨 일이죠? 급한 소식이라도 있나요?”

목덜미가 벌겋게 달구어진 여은혜가 질문을 던지면서 고개를 가볍게 떨궜다.

“네.”

노인의 대답에 후계자도 관심을 보였다. 

“무슨 소식인지 빨리 말해 보게.”

노인이 시치미를 떼면서 말했다.

“그게… 이철희가 일을 그르쳤다는 것과 서정 일행이 지금 LBA바이오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조사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만.”

여은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하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녀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이마에 번지르르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고 어색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몹시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철희가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있었지만, 서정 일행이 LBA바이오를 다시 조사한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전해진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소식을 전한 노인은 몹시 후회하고 있었다. 기실 노인은 여은혜가 아닌 후계자가 먼저 나서기를 바랐다. 그런데 후계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이 빗나간 데 대한 당혹감으로 노인의 안색 또한 창백하게 변하고 말았다.

여은혜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후계자의 눈치를 살피며 불쑥 내뱉었다.

“그들이 아직 알아서는 안 돼.”

소름이 돋도록 낮고 매서운 목소리였다. 그녀는 실상 후계자를 간접적으로 추궁했던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후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생각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 일은 이미 시작했으니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는 일만 남았는데 오히려 잘 된 셈이 아닌가. 흐흐!”

후계자는 여은혜나 그녀의 수하 노인을 자기가 부리는 로보트처럼 여기며 자못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부린다는 게 새삼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고,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명령을 내리는 보람도 느낄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