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반 토막, 서민에게 축복인가

집값 반 토막, 서민에게 축복인가

기사입력2017.08.22 오전 3:15

버블 붕괴시킨 일본 은행 총재, 처음엔 서민의 영웅이라 칭송
20년 장기 불황의 문 열어… 결국 서민이 최대 피해 보게 돼

차학봉 산업1부장

일본 중앙은행 일본은행의 26대 총재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는 한때 서민의 영웅 정의의 사도로 칭송받았다. 1989년 총재에 취임한 그에게 쏠린 국민의 간절한 원망(願望)은 버블 퇴치였다. 당시 5년 사이에 주가는 3배, 도시 땅값은 4배가 뜀박질했다. 서민들이 "영영 집을 사지 못하는 것 아닌가" "부동산 가진 자들만 더 부자 되는 불합리한 세상" 등 분노를 쏟아냈다. 미에노 총재는 "부동산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어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자산 가격을 바로잡아야 한다"며 정의의 칼을 휘둘렀다. 칼은 금리 인상 등 금융 긴축이었다. 취임하자마자 정책 금리를 3.75%에서 4.25%로 올렸고 1년도 되지 않아 6%까지 올렸다. 부동산 가격은 하락세로 돌아섰고, 국민은 환호했다. 일본 정부의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까지 가세, 부동산 가격은 날개 없이 추락했다.

버블 퇴치술로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금리 인상과 대출 규제라는 마법의 방망이를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도 방망이 휘두르기를 주저한다. 이 역시 미에노 총재 교훈 덕분이다. 버블 퇴치에 대한 환호는 잠깐이었지만, 그 후 고통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일본의 버블이 꺼지고 부동산 담보대출이 부실 채권으로 전락하면서 은행과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실업자가 속출했다. 당시 재계에서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 요청이 쏟아졌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버블의 완전한 퇴치 를 요구했고 미에노 총재 역시 "버블이 또 생길 수 있다"며 완강하게 버텼다. 그 사이 일본은 20년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고 미에노 총재는 장기 불황의 원흉으로 전락했다. 서민을 위한 미에노 총재의 신념이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서민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불황으로 자살이 급증, 연간 2만1000명 정도(1991년)였던 자살자 수가 3만4000명(2003년)까지 치솟았다.

노무현 정부 부동산 정책을 주도했다는 김수현 사회수석이 다시 8·2 부동산 대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김 수석은 20대에 판자촌 철거 반대 운동을, 30대에 빈곤 연구를 한 도시 및 지역계획학 박사 출신이다. 경력뿐만 아니라 부동산은 끝났다 부동산 신화는 없다등의 저서를 살펴보면 김 수석은 경제 전문가라기보다는 부동산을 정의와 인권 문제로 보는 사회운동가적 시각이 강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집값만은 잡겠다 부동산은 재테크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신앙적 신념과 정책관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그에게서 서민 영웅 미에노 총재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김 수석은 8·2 대책을 통해 일본 버블 붕괴를 촉발했던 대출 규제의 일부를 꺼내 들었다. 한국은행은 금리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김 수석이 미에노 총재처럼 마법의 방망이를 휘두른다면 집값을 손쉽게 반 토막 낼 수 있다. 청와대 왕수석이라는 김 수석의 영향 탓인지 대통령과 장관의 부동산 관련 발언이 거칠고 강경해지고 있다. 서민에게 진정 축복이 되는 주택 정책은 무엇일까. 빚을 내 집 한 채 산 사람에게 집값 반 토막이 사회 정의일까. 저렴한 임대주택의 획기적 공급 확대가 미친 월세 미친 전세에 시달리는 서민을 위한 진짜 주택 정책일 것이다.

일부 지역 집값이 치솟았지만, 부동산 시장은 전반적으로 허약하고, 초봄 빙판처럼 곳곳에 잔금이 가 있다. 입주 물량 급증, 금리 인상, 급속한 고령화, 내수 침체 등이 겹치면 장기 침체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수석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중산층 주택까지 규제의 칼을 마구 휘두르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속도와 강도 조절에 실패하면 미에노 총재처럼 경제 참화를 초래할 수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서민일 수밖에 없다. 김수현 수석의 열정과 문제의식이 미에노 총재의 패러독스를 현명하게 극복하고, 서민 주거난 해결의 획기적 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